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문단 편집) == 성격 및 일화 == ||<:>[[파일:Richard_Wilson_-_Cicero_with_his_friend_Atticus_and_brother_Quintus,_at_his_villa_at_Arpinum_-_Google_Art_Project.jpg |width=850]]|| || 리처드 윌슨 작의 '키케로와 아티쿠스, 동생 퀸투스'. 1771년.[br]이 셋이 화자로 등장하는 키케로의 저서 『법률론''De Legibus''』을 묘사하고 있다. || 키케로의 개인적인 성격이나 일화들은 유달리 자세히 남아 있는데, 격동의 시기라 기록이 많았던 것도 한몫하지만, 본인부터가 편지를 매우 많이 쓰는 성격이었던데다 특히 가장 많은 편지를 주고받은 절친 [[티투스 폼포니우스 아티쿠스]]가 '''[[정조 어찰첩|키케로에게 받은 편지를 모조리 보관해 뒀기 때문이다.]]''' 정작 아티쿠스는 키케로 사후 자기가 키케로에게 보낸 것들은 싸그리 찾아내 없애 버렸기 때문에 ~~이 양반이~~ 키케로의 시도때도 없는 [[징징]](…)에 아티쿠스가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알 수 없다. 키케로 사후 그의 해방노예이자 비서였던 티로가 아티쿠스에게 이 편지들을 받아 책으로 묶어 출간했다. 남아있는 서간과 행적을 보면 개인적으로는 성격이 괜찮은 사람이었다. [[정적#s-2|정적]]인 카이사르와의 사이도 우호적인 편이었고,[* 친구라고 하기엔 두 사람 모두 서로의 존재를 마냥 긍정하진 않았다. 오히려 카틸리나 탄핵에서 대립한 일을 기점으로 둘의 관계는 악화해 이후 내심 상대방을 썩 탐탁지 않은 존재로 여긴듯하다.] 종종 지나치게 참견하려다 반발을 사긴했지만 동생을 아낀 것만은 사실이며, 여자 문제 없이 아내에게 충실했고 자식들에게도 애정을 쏟았다.[* 특히 딸 툴리아를 무척 아껴, 딸이 세상을 떠나자 한동안 삶의 의욕을 잃고 실의에 빠지기도 했다.] 티로를 비롯한 노예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비록 공문서등에선 노예의 버릇을 바로잡기 위해선 잔혹해야 된다고도 얘기했지만, 아들에게 남겨주기 위해 집필한 'De officiis(의무에 관하여)'에서는 노예에게 잘 대해주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미덕이며 '그 불운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일을 시킬 때에는 반드시 예의바르게 권할 것이며, 상응하는 보상을 반드시 주어야 한다'고 일렀다.[* 무리도 아닌 것이, 애초에 키케로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은 인간이 친절과 연민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라고 쓴 이상주의자였다. 다른 저작도 읽어보면 대체로 도입부에 큰 이상을 세운 후 본론에서는 이걸 어떻게 현실로 구현할 수 있을지 나름 전략을 세우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 또한 티로가 몸이 아프자 걱정해서 의사도 보내주는등 아랫사람에게 매우 친절했다. 이는 공화정 말기~제국 초기의 귀족들 사이의 특징이기도 했는데, 당시 그들은 자신의 노예들에게 잘 대해주는 것이 교양과 명예를 잘 보여주는 행동이라 생각했다. 티로의 경우는 단순히 키케로의 노예일뿐 아니라 친구이자 비서이기도 했는데 키케로가 말하는걸 뒤쳐지지 않고 적을수 있었을뿐 아니라 키케로가 연설문을 작성하는데에도 도움을 주기도 했다[* 사람이 말하는 속도로 글을 썼다는 이야기. 이런 이유로 오늘날 키케로의 저작이라고 전해지는 작품들은 사실 키케로의 것이 아니라 티로의 것이라는, 농담 섞인 주장도 있다.]. 티로가 해방된뒤에 토지를 사자 키케로는 그에 대해 축하하는 편지를 썼고 티로도 꾸준히 키케로와 그의 가족을 도왔다. 티로가 과로로 쓰러지자 키케로는 이에 의사도 보내고 하루에 편지를 3통이나 쓸 정도로 그를 걱정했다. 티로는 키케로 사후 그의 열전을 작성했다고 하고 100세까지 살았다고 한다. 다만 키케로는 타인의 좋은 점을 비교적 너그러이 칭찬했으나 자화자찬이 심한 편이라 타인의 빈축을 사기도 했다. 예를 들어 그는 자신의 집정관 재임기를 자축하는 취지에서 집정관인 자신이 올림포스의 신들과 카틸리나의 난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는 모습을 묘사한 글을 썼고, 킬리키아 속주 총독으로 활동하던 시절 군을 지휘해 소규모이나 성공적인 성과를 거두자 (아마도 장난이었겠으나)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자신보다 그리 나을 것 없는 지휘관으로 취급했다. 게다가 그의 이런 면모는 널리 알려져 있어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기도 했다. 그를 아버지라 부른 옥타비아누스는 말 할 것도 없고, 삼두 결성 이전 폼페이우스와 반목하던 크라수스는 동방에서 귀환한 폼페이우스가 쌓은 공적의 빛을 바라게 할 속셈으로 원로원 회의에서 키케로의 집정관 재임기를 한껏 칭송하는 연설로 그를 들뜨게 했다. 그러나 그 여파로 키케로는 한동안 폼페이우스와의 관계가 악화되는 대가를 치뤄야 했다. 또한 키케로는 기본적으로 유쾌한 성격이고 농담과 풍자를 좋아했는데[* 바로 이러한 점에서, 그의 정적인 카이사르와 나름대로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할 수 있었을 것이다. 카이사르도 사적으론 관대하고 유쾌하며, 그리스 문화의 애호가이자 수사학 고수였다. 이는 키케로와 일치한다.] 이것이 시간과 장소 및 상대를 가리지 않고, 심지어 클로디우스나 옥타비아누스 같은 정적까지 대상으로 삼은 탓에 타인에게 불쾌함을 안겨준 것을 넘어 그것이 부메랑으로 돌아와 자신을 곤경에 빠트리기도 했으니 그의 입은 그에게 성공과 좌절을 모두 안겨줬다고 할 수 있겠다. 키케로의 이러한 성격적 결함들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도 상당히 인용되어 있는데, 그 중 일부만 추려내서 인용하자면 이렇다. >키케로가 캄파니아의 땅을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자는 제안을 내놓았을 때 대부분 원로원 의원들은 반대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나이가 많은 의원이었던 루키우스 겔리우스는 눈을 감기 전에는 절대로 이 제안을 통과시킬 수 없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키케로는 이렇게 말했다. "그럼, 어디 기다려 보지요. [[패드립|뭐 그리 오래 걸릴 것 같지도 않으니 말이오.]]" >---- >언젠가 그는 연단에 올라가서 [[크라수스|마르쿠스 크라수스]]에 대해 굉장한 칭찬을 했는데, 그때 관중들은 아주 큰 박수를 보내주었다. 그런데 며칠 뒤 그는 똑같은 연단에 올라가 크라수스를 몹시 공격하는 연설을 했다. 그러자 크라수스는 그를 불러서서 물었다. "아니, 이것 보시오. 바로 며칠 전에 당신은 바로 여기서 내 칭찬을 하지 않았소?" >키케로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랬지요. 나쁜 일을 한 사람을 얼마나 칭찬할 수 있는지, 내 웅변 실력을 한 번 시험해 봤었지요." >---- >또 어느 때인가 크라수스는 연단에 올라서서, 자기 조상 중에 60이 넘도록 수명을 누린 사람이 없다고 얘기했다. 그러나 며칠 후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고 말하며 자기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키케로에게 말했다. 그러자 키케로는 대답했다. "그거야 시민들의 인기를 끌려고 그랬겠지요. 시민들은 그런 말을 들으면 기뻐할 테니까요." >---- >크라수스의 아들 중 하나가 악시우스라는 사람의 얼굴 생김새를 너무나 많이 닮아서 크라수스의 아내의 행실이 의심 받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 아들이 원로원에서 아주 훌륭하게 연설을 한 적이 있었다. 그것에 대해 평가를 해보라는 청을 받자, 키케로는 이렇게 대답했다. "과연, 악시우스[* 악시우스는 그리스어로 '잘 어울리는'이라는 뜻이다.] 크라수스로군." >---- >시리아로 출정하게 된 크라수스는 키케로를 식사에 초대했다. 키케로는 이 초대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런데 며칠 뒤 한 친구가 키케로를 찾아와서 바티니우스가 그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키케로는 "그러면, 바티니우스도 나와 저녁을 먹고 싶다는 얘긴가?"라고 하여, 크라수스의 형식적인 초청을 비꼬었다. '''크라수스에 대한 키케로의 태도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키케로 열전> 中 그래도 키케로는 해방 노예인 티로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도 하고, 사적으로 상당히 폭넓은 친분관계를 쌓는 등 종합적으로 거슬리는 면이 있긴 해도 사교적인 성격의 사람이었다. 사실 자화자찬은 일반적으로 자수성가한 사람들에게 곧잘 관찰되는 특징이고, 키케로에겐 기사계급 출신의 '신참자'인 자신이 원로원 의원에 공화국의 집정관까지 올라섰다는 실적이 있었기에 아주 이해못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내가 말을 너무 잘해서 학부모들이 내 논변을 들으러 학교에 왔다는 식의 말을 한 걸 봐선, 키케로의 자화자찬하는 성격은 기본적으론 타고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참자로서 집정관까지 오른 것이 그의 자부심의 원천이었다면, 동시에 신참자라는 정치적 신분은 그의 가장 큰 컴플렉스였다. 과장해서, 그의 정치적 행보는 전부 신참자인 자신의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투쟁으로 요약이 가능하다. 그래서 키케로는 정계에서 몇 대를 이어 성공해온 가문이나 유서 깊은 역사를 지닌 가문 출신 인사와 비교되는 일에 굉장히 민감한 반응을 보였고, [[대 카토]]라는 유명한 선조를 뒀으며 그 무렵 당대 옵티마테스의 리더로 부상하던 [[소 카토]][* 보수파의 리더격이라는 이미지 때문인지 많은 매체에서 꼬장꼬장한 노인으로 묘사되지만, 사실 소 카토는 키케로보다 '''11살''', 카이사르보다도 5살이나 어렸다. 카이사르의 애인으로 유명한 [[세르빌리아]]가 카토의 이부누나였다.]가 원로원 회의에서 자신과 상반된 의견을 지닌 신참자 의원과 논쟁을 벌이다 화를 못이기고 상대의 뺨을 갈기는 폭거를 저지르자 기겁하며 편지로 친우인 아티쿠스에게 불만을 쏟아냈다. 아티쿠스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일화도 있다. 원래 키케로와 카이사르는 [[정적#s-2|정적(政敵)]]이기 이전에 사적으로는 편한 사이였기 때문에 카이사르의 집무실 또한 키케로는 제집 드나들듯 자유로이 방문했는데, 카이사르가 독재관이 되고 난 후 업무량이 늘어나 새로 충원된 비서들이 그 사실을 모르고 '저기서 대기표 뽑고 기다리세요.' 하고 못 들어오게 해서 앉아서 대기해야 했던 적이 있다. 한때는 자신이 선배 정치인[* 키케로는 카이사르보다 6살 연상이고, 원로원 의석도 6~7년 먼저 받았다. 그리고 로마인들은 경험과 연륜을 상당히 존중하고 우대하는 편이었다. 당장 [[원로원]](Senatus)부터가 (실제로 노인들로만 구성되었던 것은 초창기 뿐이지만) 이름 그대로 노인들의 지혜를 모으고자 만들어진 기관이었다.]이자 대등한 사이였는데 이젠 이런 처지라니 굴욕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굴욕감은 곧 말끔히 해소되었는데, 마침 볼일이 있어 잠시 집무실을 나왔던 카이사르가 대기실에 있는 키케로를 보고는 '''"이래서야 내가 미움을 받고 있다는 소문이 거짓말이라고 말할 수 있나? 그 마르쿠스 키케로조차도 자유롭게 내 집무실에 들어오지 못하고 대기실에서 기다려야 하는 게 현실이라면..."''' 이라고 비서들을 갈군 것이다. 키케로는 당연하겠지만 크게 감동을 받았다고. 이런 일화를 편지에 적어 보낸 걸 보면 키케로의 성격을 엿볼 수 있는 동시에, 카이사르의 사람 마음 휘어잡는 솜씨(…)[* 아마 키케로가 자뻑이 심하다는 것을 감안한 의도적인 오버액션(?)이었을 것이다. 이전에도 키케로가 폼페이우스 편에 붙었다가 폼페이우스가 패망하자 그 또한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어 카이사르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는데, 개선한 카이사르는 키케로를 보자마자 말에서 내려 그에게 먼저 다가가 친근하게 대했다. 카이사르가 키케로를 인간적으로 좋아한 측면도 있겠지만 확실히 사람 다루는 솜씨가 보통내기가 아니다. 카이사르 정도의 군사적·정치적 역량을 가진 사람들은 로마 역사상 꽤 있었으나, 인간의 심리에 대한 이런 깊은 이해와 통찰은 카이사르의 일생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그만의 특장점이다.]도 알 수 있다. 개인적으로 [[클레오파트라]]를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이유는 선물을 보내주겠다고 하고 안 보내주었기 때문이라고. 좀 쪼잔한 면도 있었던듯. 키케로가 어느정도 성격적인 약점을 보이긴 하였으나, 오히려 편지에 나타나는 정이 많고 고민하는 모습에서 인간미가 느껴진다고 할 수도 있다. 또한 그의 많은 장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약점들은 이럭저럭 상쇄가 가능하며, 사적인 서간에서는 우는 소리를 하긴 하였으나 그러면서도 필요할 땐 움직였다는 사실은 높이 평가할만 하다. 특히 카이사르 사후 군사력도 없고 민중의 지지도 약한 상황에서 자신의 정치력을 바탕으로 짧은 시간이나마 안토니우스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붙인 수완은 그의 저력을 보여주는 일화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의 이상을 이룩하기 위한 현실주의자 기질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었고 정치적 식견도 나쁘지 않았다. 살아생전 정치적인 측면에서 카이사르와 그의 후계자에게 완패했으나 그것은 상대가 너무 뛰어났을 뿐, 애초에 본연의 능력이 부족했다면 집정관까지 올라가는 일 자체가 무리였을 것이다. 참고로 정치인들과 장군의 경계가 모호했던 [[로마 공화국]]의 정치인 답지 않게, 집정관까지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키케로는 장군으로서의 이미지가 약한 편이다. 실제로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 의하면, 키케로가 시민들에게 '샌님'이라는 평가를 듣기도 했다. 다만 킬리키아 총독 시절 군사적 업적으로 인해 '위대한 장군'이라는 명예로운 호칭도 받아보는 등 군사적 행적이 아예 없는 인물은 아니다. 대적한 상대가 군대가 아니라 산적들이기는 하지만. 수사학적 시선에서 보자면 키케로는 변호사답게 길고 화려한 문장을 자주 썼으며 그의 문장은 훌륭한 [[라틴어]]의 표본으로 쓰인다. 특히 카틸리나의 반란사건 때 한 연설인 "카틸리나 탄핵"은 키케로 문장의 걸작으로 꼽히며 오늘날 라틴어를 배우는 유럽의 고등학생들의 머리를 아프게 하는 문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연설 말고 철학적 저술을 읽어보면 논리정연하기 그지없으며 수사학에 정통한 변호사답게 풍부한 예를 제공하여 비교적 머리를 덜 쥐어뜯게 되는 편이다. 또한 변증법적 구조를 주로 사용하여 철학적 결론을 제시하는데, 그 과정이 논리적이라서 따라가다 보면 플라톤 왈 아리스토텔레스 왈이 그다지 어렵지 않게 느껴진다. 도덕 교육에 있어서도 저서 「의무론」이 서양에서는 고전으로 사랑받아 왔다. [[볼테르]]는 1771년에 다음과 같이 평했다. >"아무도 이보다 더 현명하고 더 진실되며 더 유용한 어떤 것도 쓰지 못할 것이다. 이후로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거나 훈시하려는 야심을 가진 어떤 작가가 만약 키케로의 「의무론」보다 더 잘 쓰기를 원한다면 그 작가는 허풍선이이거나 아니면 그러한 책들은 모두 이 책의 모작이 될 것이다." 키케로는 그리스도교의 교부들에게도 주목 받았는데, [[아우구스티누스]]는 젊어서부터 지금은 유실된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Hortensius)를 읽고 진리추구에 대한 열의를 열었으며, 역작 『신국론』에서는 키케로를 25회나 직접 인용하고 또는 언급했다. 그 자신이 수사학 교수이기도 했던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들에 나타나는 수사학적 기교는 키케로의 문장과 연관이 깊고, 보에티우스의 대화체와 문장 형식에서도 키케로의 수사학이 흔적을 보인다.[* 보에티우스의 『철학의 위안』(De consolatione philosophiae)에는 키케로의 문장이 강렬하게 반영되고 그는 『변론입문』(Topica)를 주석하기도 했다.] 호교론자 [[락탄티우스]](Lactantius)는 '그리스도교 키케로'라고 불릴 정도로 키케로의 수사학과 사상에 심취했다.[* 『신적 교양』(Divinae institutiones) 전체가 키케로의 문장을 표준으로 집필된다.] [[암브로시우스]]는 저서 『의무론』에서 내용으로도 제목으로도 문체로도 키케로의 저작과 연관이 깊다. 이 중 가장 압권은 불가타 성경의 번역자로 유명한 [[예로니모]](히에로니무스)인데, 예로니모는 키케로에 너무 빠져든 나머지 꿈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 "너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키케로주의자이다"라고 꾸중을 하였다고 한다. 이게 진짜로 계시이든, 혹은 예로니모의 트라우마에 기인한 단순한 꿈이든 간에, 예로니모가 얼마나 키케로빠였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라 할 수 있다. 르네상스때 키케로의 작품은 또 주목 받게 되는데, [[니콜로 마키아벨리]] 등 공화주의자들이 키케로의 논리를 계승했으며, 그 외에도 그의 정치적 견해를 담은 수많은 연설문들이 주해되어 돌아다녔고, 키케로의 문장을 모방해 집필하는 일이 학계의 유행이 되었을 정도다. 심지어 레오나르도 브루니(Leonardo Bruni, 1369~1444)의 별명이 '새로 나온 키케로'였다는 것은 키케로가 가졌던 위상을 잘 보여준다. 동시에 [[빠가 까를 만든다|빠가 까를 만드는 풍조도 생겨]] 에라스무스는 당대 지성인들이 지나친 키케로 위주의 문학에 반발하기도 했다.[* 에라스무스는 "나는 키케로가 아니다. 나는 내 문장으로 표현했다"라고 말하였다.] 그외에 알려지지 않은 사항으로, 키케로는 당대에는 시인으로도 이름을 날렸다. 다만 만렙 수준에 도달했던 그의 연설 솜씨와는 달리, 운문쪽은 '읽을만한 베스트셀러 작가' 정도의 위치였기에, 키케로의 시들은 후대에 거의 인용되지 않았고 지금은 소실되었다. 그의 저작인 최고선악론은 20세기에 약간의 마개조를 거쳐서 [[Lorem Ipsum]]이라는 샘플 텍스트로 쓰이고 있다. 고대인으로는 드물게 좋아하던 음식의 기록이 남아 있는데, 지금의 형태와는 달랐지만 [[라자냐]]를 매우 좋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